동심은 어떻게 없어지는가?
우리는 동심이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 치고 동심이 남아있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 책에서도 주인공은 동심이라는 것에 조금은 의아함을 나타낸다. '그럴 시간이 없다'라는 이유 때문이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학습에 있어서는 '그저 열심히 엉덩이 붙이고 하면 된다'라는 이야기를 계속하게 된다. 과연 그럴까? 사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맞는 사람과 맞지 않는 사람이 존재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배워야 하는데 그런 부분을 전혀 고려해 주지 않는다. 단지 사람이 많다는 이유지만 이제는 아이들도 줄고 있어서 그렇게 안 해도 된다. 그런데 왜 변하지 않을까?
이 책은 그러한 변하지 않는 점을 꼬집는다.
항상 백 년 전통, 20년 명문으로 이끈을 자랑하는 교감 선생님은 과거에서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주인공인 우주의 어머니는 과거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된다'라는 생각을 강요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교류를 어색해하고 싫어하는 찬우라는 친구는 마음의 문이 닫혀있기만 하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교육의 현실이고 실태이다. 변화가 없는데 어떻게 바뀌길 바라는 것일까? 세상은 이제 소프트웨어가 필요하고 반도체 학과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배우는 것은 전혀 다른 국영수과에서 머물러 있다. 이 과목들이 안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왜 지금도 필수여야만 하는가? 아니게 될 수는 없는가?
슬라임은 바로 그런것을 먹고사는 존재라고 한다.
이 책에서 나오는 슬라임은 바로 그런 불편한 감정들을 먹고사는 존재라고 한다. 위에 나온 다양한 불합리에 의해서 발생되는 불편한 감정들을 먹으면서 점차 자라나게 되는데 중간중간 삽화가 되어 있는 만화에서 조금은 이해가 쉽다(내용 연계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지만 삽화 내용은 뭔가 이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만약 슬라임 가게를 외계인이 만든 것이라면? 외계인이 사람의 불평, 불만들의 에너지를 먹고사는 것이었다면?이라는 가정을 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연결이 참 자연스럽다.
우리 아이에게 읽혀주고 싶다.
지금 나는 우리 아이에게 이런 식으로 교육을 하고 있지 않을까? 가끔 공부를 시키면서도 저렇게 싫다고 하는데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맞나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초등 교육이 쉬우면서 편하게 설명을 한다고 해도 점차 어려워 지는데 이러한 큰 틀 자체가 변하지를 않으니 결국 반복과 암기로 승부를 하게 한다. 이해를 하기에는 배울 것이 너무 많고 복잡하다. 세상은 사실 국영수과를 모두 잘하는 사람이 굳이 많이 필요 없는데 말이다. 아이가 읽는 것보다 내가 읽고 느낄 게 더 많았던 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